1년 전 일본이 기습적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자 산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절박감이 산업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일본 의존도가 높았던 반도체 소재 시장에서 묵묵히 기술력을 키워 자립화 기반을 닦은 업체들은 조용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반도체 회로기판 제조에 들어가는 도금 소재 제조업체 와이엠티 연구원들이 지난 25일 인천 남동구 와이엠티 본사 연구실에서 도금 소재에 들어가는 약품을 연구하고 있다. 인천=최현규 기자

“일본 수출규제가 오히려 기회였다”

지난 25일 찾은 인천 남동구 와이엠티 본사 연구실에서는 젊은 연구원들이 투명한 용액이 담긴 플라스틱통을 들고 실험을 한창 하고 있었다. 와이엠티는 스마트폰이나 반도체에 들어가는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에 사용되는 도금 소재를 만드는 기업이다. 기판의 산화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가장 마지막 공정에 사용되는 용액인데 와이엠티가 뛰어들기 전까지 이 용액은 100% 일본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와이엠티는 2007년 삼성전자와 ‘무전해 니켈-금 도금 소재’ 개발에 성공했다. 극일의 계기가 될 수 있었지만 이후 대기업들이 기존 일본 기업과의 거래를 계속 유지해 온 타성을 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본 수출규제 조치가 나왔고 와이엠티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올 들어 PCB 도금 소재 분야 국내 시장점유율의 70%를 되찾으며 국산화 토대를 닦았다. 국내 시장점유율 1위 달성을 넘어 일본 기업을 제치고 폭스콘 등 중화권 시장에서도 도금 소재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삼성뿐 아니라 애플, 화웨이 등 주요 전자업체 스마트폰에 와이엠티의 도금 소재가 들어간다.

와이엠티 전찬우 이사는 “(비결은) 첫째도, 둘째도 기술력”이라고 강조했다. 산화·부식 방지를 위해 쓰이는 금은 기판 위에 바로 붙지 않는다. 머리카락 두께인 20㎛(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폭 회로와 회로 사이 마스킹테이프를 붙이고 니켈을 얹은 뒤 그 위에 금을 올리는 것은 이 업체의 독보적인 기술력이다. 전 세계에서 금 도금은 한국의 와이엠티와 일본 우에무라, 오쿠모 3개 업체만 가능하다. 연간 국내 매출의 4분의 1가량인 100억원 이상을 매년 연구·개발(R&D)에 투자한 것이 비결이다.

전 이사는 “일본 수출규제는 오히려 기회였다. 그동안 일본 업체 제품을 썼던 국내 수요 기업들이 수출규제를 계기로 우리 제품을 한 번이라도 더 검토하게 됐다”고 말했다. 와이엠티는 최근 반도체 패키지 기판에 들어가는 극동박(구리로 만든 아주 얇은 도금 소재) 국산화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일본 기업 미쓰이가 세계 시장 100%를 점유하고 있는 분야다. 정부도 극동박 국산화에 향후 4년간 170억원을 지원한다.

메탈라이프 직원들이 지난 29일 경기도 안산의 본사 내 적층 세라믹 제조라인에서 제품 공정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안산=최현규 기자

공고한 日 방해와 높은 장비 의존 한계도

반도체 패키지 분야에서도 자립화의 성공 신화를 쓴 기업이 있다. 지난 29일 경기도 안산 본사에서 만난 한기우 메탈라이프 대표는 “해외 전시장에 갈 때마다 일본이 하는 걸 우리는 왜 못할까 부러웠다”고 털어놨다. 화합물 반도체는 두 가지 이상의 화학 원소로 만든 반도체로 통신장비, 레이저, 카메라 등에 두루 쓰인다. 이 반도체 칩을 열과 충격, 습기 등으로부터 보호하고, 전력을 공급하도록 감싸는 것이 패키지 부품의 역할이다. 메탈라이프는 이 패키지를 국내 최초로 국산화했다. 메탈라이프 양산 성공 이전까지 화합물 반도체용 패키지는 100% 일본 수입이었다.

한 대표는 “한국에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도전을 시작한 지 거의 10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 업체의 핵심 기술은 반도체에서 발생한 열을 빼주는 ‘히트싱크’ 소재 기술이다. 통신장비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에는 고열 발생이 불가피한데 메탈라이프가 생산한 패키지는 열 방출에서 탁월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복잡한 데이터 처리와 제품 소형화에 필수적인 ‘적층 세라믹 제조’ 기술도 독보적이다.

기술력이 뒷받침된 상태에서 일본의 수출규제는 오히려 호재였다. 한 대표는 “일본 수출규제 이후 여기저기서 소재 개발을 함께하자는 오더(주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소재·부품·장비 기업 상장지원 특례 1호로 코스닥에 상장됐다.

올 들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열화상 카메라 보급이 확산한 것도 메탈라이프에 날개를 달아줬다. 열화상 카메라 속 적외선 검출기(센서)에 이 회사가 생산한 패키지가 탑재된다.

하지만 글로벌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여전히 숙제가 많다. 일본의 방해는 생각보다 집요했다. 한 대표는 “제품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지만 일본 업체에서 기존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덤핑’까지 동원하며 방해하고 있다. 새로운 판로 개척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장비 분야의 높은 대일(對日) 의존도도 넘어야 할 산이다. 패키지 소재인 세라믹을 이용해 패키지를 만드는 생산장비 대부분은 여전히 일본산이다. 소재는 상당부분 자립화가 됐지만 소재를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는 장비는 여전히 일본 의존도가 높다. 고품질의 도금 장비 대부분 일본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한-일, 포스트 코로나 시대 국제질서 재편 시 우호 관계 중요”
[일본 수출규제 1년] ‘소부장’ 의존도 줄었지만 불확실성 여전

인천=이종선 기자, 안산=김성훈 기자 remember@kmib.co.kr
[출처] – 국민일보